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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증명하겠다며 서로의 손을 ‘쇠사슬로 묶은 채’ 생활한 커플의 결말우크라이나에 사는 빅토리아 푸스토비토바(29)와 알렉산드르 쿠들라이(33)는 개인 공간이나 사생활도 없이 24시간 내내 함께 지내는 기록을 위해 신박한 도전을 했습니다. 둘은 쇠사슬로 서로의 팔을 감싼 뒤 둘은 이러한 실험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밸런타인데이였던 2월 14일 쇠사슬로 서로의 손을 연결했습니다. 둘의 실험 시작 때 우크라이나 국가기록원 관계자가 참석했고 둘은 자신들의 시작을 응원해달라고 했는데요. 실험을 진행한지 123일 뒤 둘은 같은 자리에서 기자들을 불러 자신들의 실험이 끝났음을 알렸습니다. 두 사람은 절단기로 서로의 손에 연결돼 있는 쇠사슬을 끊어내자 그 즉시 거리를 두고 떨어졌습니다. 그러고 나서 푸스토비토바는 그 자리에서 만세를 외쳤는데요. 그녀는 “마침내 자유로워졌다. 지금까지 우리를 지지해준 모든 사람에게 감사하다”면서 “우리는 행복했고 살면서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지금도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두 사람은 이 실험으로 결혼 계획은 물론 연인 관계까지 완전히 산산조각 났다는 점을 순순히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서로 두 번 다시 볼 일이 없도록 서로 다른 지역에서 살기로 합의한 것으로 전해졌는데요. 처음에 두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함께 있을 수 있어 행복했지만, 점차 불편하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밥먹을 때와 잠잘 때는 물론 화장실에 갈 때 목욕할 때도 쇠사슬이 이어진 채 생활해야 했는데요. 비카라는 애칭을 지닌 빅토리아는 그동안 인조 속눈썹을 만드는 일을 했지만 이번 도전으로 일을 포기하고 자동차 및 자동차 부품을 판매하는 남자 친구의 일을 도와야 했던 것이 불만이었습니다. 알렉산드르 역시 비카와의 생활이 쉽지 않았습니다. 요리하거나 전화할 때 옆에서 시끄럽게 했고, 아침마다 거울 옆에 서서 비카가 화장을 다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지겨웠다고 인정했는데요. 알렉산드르는 “비카는 이전 삶의 리듬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자신이 좋아했던 것을 그리워했다”면서 “함께 하고 싶은 일을 계속하자는 내 제안에도 그녀는 그다지 반응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4시간에 걸쳐 크게 말다툼을 벌였고, 대안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두 사람은 이번 도전으로 인기를 얻어 여러 방송에 출연하며 돈을 벌었지만 수익이 공개되지는 않았는데요. 다만 수익금 중 일부를 자선단체에 기부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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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괴물이라며 그를 외면했지만 남성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이유베트남 전쟁의 고엽제 후유증 2세로 선천적 얼굴 기형과 각종 질병으로 평생을 고통 속에 살면서도 늘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잃지 않는 남성이 있습니다. 최근 베트남 현지 언론은 고엽제로 인한 얼굴 기형과 언어 장애 등으로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는 히엔(44)의 사연을 전했습니다. 베트남 남부 빈롱성에 거주하는 히엔은 베트남 전쟁 참전 용사의 아들로 1976년 태어났습니다. 5살이 되면서 머리가 부풀어 오르듯 커졌고, 걸핏하면 고열에 시달렸는데요. 하지만 가난한 형편에 전문의를 찾아갈 수 없어 동네 의원에서 받은 해열제만으로 버텨야 했습니다. 히엔의 머리와 턱이 비정상적으로 커지면서 누구라도 그를 한번 보면 놀라서 도망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문제는 더욱 커졌는데요. 히엔을 보고 놀란 아이들이 수업에 집중을 못 한다는 학부모들의 항의에 결국 히엔은 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 이후 사람을 두려워하게 된 히엔은 집에만 갇혀 지내야 했는데요. 당시 히엔의 엄마는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고, 아빠가 일하러 나간 텅 빈 집에 남겨졌습니다. 홀로 지독한 외로움을 견뎌야 했습니다. 히엔이 12살 무렵 아빠는 새엄마를 데려왔습니다. 하지만 새엄마 역시 여느 사람들처럼 히엔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을 꺼렸는데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히엔의 겉모습이 아닌 내면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면서 마음이 열렸습니다. 새엄마는 “히엔의 친절하고 착한 성품, 부모에게 순종하는 모습에 나의 마음이 녹아내렸다”고 전했습니다. 히엔은 10대부터 가족의 생계를 돕기 위해 거리에서 복권을 팔았는데요. 처음에는 그의 얼굴을 보고 도망쳤던 사람들이 차츰 그의 기이한 생김새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관광객들은 그의 얼굴을 구경하며 복권을 사주었습니다. 히엔의 장사가 잘되자 이를 시기한 주변 상인들은 히엔에 관한 헛소문을 퍼뜨리며 그를 비방했는데요. 마음에 상처를 입고 절망에 빠진 히엔은 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마음을 위로해주는 친구들을 알게 됐는데요. 다름 아닌 참새와 비둘기들이었습니다. 새들은 그의 기이한 생김새를 보고 놀라 도망치지 않았고, 그가 주는 먹이를 찾아 모여들었는데요. 아무 편견과 차별 없이 다가오는 새들을 사랑하게 되면서 그의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모두 어려운 시기에 그의 순수하고 맑은 미소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는데요. 불행할 것만 같은 외모를 지닌 사람에게서 끊임없이 차오르는 기쁨에 찬 미소는 차츰 많은 고객을 끌어모으게 됐습니다. 그는 번 돈을 모두 부모님과 어려운 이웃을 위해 씁니다. 그의 새엄마는 “히엔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누구보다 친절하고 똑똑하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산다”면서 “불운한 삶을 짊어져야 했던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고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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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T 촬영으로 밝혀진 이집트 미라속 ’49개 물체’의 놀라운 정체기원전 332년에서 기원전 30년 사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공동묘지 나그 엘-하사이에서 1916년 처음 발굴된 미라. 하지만 내부를 살펴보려 미라를 풀어헤치는 것만으로도 시신이 훼손될 수 있기 때문에 오랜 기간 조사가 진행되지 않았는데요. 최근 미라의 관을 열지 않고도 내부를 살펴볼 수 있는 CT 스캔 방식이 도입되면서 ‘황금 소년’의 모습이 세상에 알려지게 됐습니다. 소년의 나이는 사망 당시 14∼15세, 키는 128㎝ 정도로 추정됐는데요. 작은 코와 좁은 턱, 계란형 얼굴을 가진 아이였습니다. CT 촬영 결과 이 황금 미라는 총 2개의 관으로 감싸인 형태로, 안쪽 나무관에는 금박을 입힌 얼굴 무늬가 새겨진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CT 사진에선 소년의 입과 가슴 등에서 총 21가지 모양을 가진 다양한 부적 49개가 발견됐는데요. 대부분 금이었습니다. 사하르 살림 카이로대 교수는 부적의 목적이 “사후세계에서 신체를 보호하고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말했는데요. 고대 이집트인들은 사후세계로 가려면 위험한 지하세계를 통과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 중 ‘황금 혀’ 부적은 사후세계에서 말을 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또 소년의 발에는 관을 떠나는 데 도움을 주는 의미로 샌들이 놓여있고, 온몸은 이집트인들이 중요시했던 양치식물로 휘감겨 있었습니다. CNN은 소년의 신원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치아 상태와 미라의 기술 수준, 부적들에 비춰 사회적 지위가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고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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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영상) 바이러스로 의사가 포기했던 6살 소년, 68년을 통 속에서 생존하며 이룬 기적 같은 꿈…평생을 커다란 통 속에 갇혀 살아온 남성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폴 알렉산더, 사실 그는 통속 강제로 갇혀 산 게 아닙니다. 살아남기 위해 생존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이 속에 들어갔습니다.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절대 포기하지 않았어요” 이 악물고 버티며 지금까지 살아남았습니다. 그렇게 버티다 보니 벌써 68년이나 흘렀네요. 현재 74세가 된 알렉산더 씨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는 6살 무렵이었던 1952년부터 철로 만든 통 속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생활했다고 합니다. 1952년 미국 텍사스주, 당시 6살 소년이었던 알렉산더는 급하게 집으로 뛰어와 엄마를 찾았습니다. 몸이 이상했기 때문인데요.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고 온몸이 펄펄 끓는 것처럼 고열 증세가 나타났습니다. 또 호흡도 점차 가빠지고 목에 통증이 느껴졌습니다. 벌컥 겁이 났던 소년 알렉산더는 엄마에게 달려갔습니다. “세상에…” 알렉산더의 상태를 본 엄마의 첫마디였습니다. 엄마는 깨달았습니다. 알렉산더가 소아마비 증상을 보인다는 사실을 말이죠. 믿기지 않겠지만 1940년대와 1950년대에는 미국에서 소아마비 환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공식적으로 집계된 환자만 6만 명이 넘는데요. 소아마비는 폴리오바이러스에 의한 신경계 감염성 질환으로 심할 경우 호흡조차 힘들 만큼 전신 근육이 마비됩니다. 한순간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으며, 전염성도 상당히 강합니다. 폴리오 바이러스는 감염자의 침이나 감염자가 기침할 때 배출되는 비말을 통해 전염됩니다. 최근 전 세계를 충격과 공포에 빠뜨린 그 바이러스와도 유사하죠. 소아마비가 창궐했던 당시 미국에서도 공공장소를 폐쇄하는 등 특단의 조치를 취했지만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소아마비 환자를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알렉산더도 그중 한 명이었습니다. 중증 소아마비 진단을 받은 알렉산더는 목 아래 모든 근육이 돌덩이처럼 굳어버렸습니다. 숨 쉬기도 힘든 상황이라 생존을 위협받고 있었습니다. 결국 알렉산더는 아이언 렁 속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이름 그대로 철로 만든 폐라는 뜻을 가진 이 기계는 폐가 정상적으로 가능할 수 없을 만큼 근육이 마비된 환자를 위해 개발되었습니다. 진공 상태 통에 들어간 환자를 인위적으로 팽창시켜 원활하게 호흡하도록 도와주는 의료기기입니다. 알렉산더뿐만 아니라 수많은 소아마비 환자들이 아이언 렁에 들어가 죽을 힘을 다해 버텼습니다. 백신과 치료법이 개발될 때까지 말이죠. 당시 미국에는 아이언 렁 공장이라고 불리는 치료 시설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소아마비 환자들이 한 곳에 모여 통 속에 들어가 치료를 받았습니다. 알렉산더는 포기하지 않고 누구보다 치열하게 생존했습니다. 통 속에 누운 채로 입과 붓에 펜을 물었습니다.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썼으며 공부도 했습니다. 아이언렁의 도움 없이 스스로 호흡할 수 있도록 훈련도 했습니다. 다만 몇 분이라도 통 밖으로 나와 버틸 수 있도록 말이죠. 그렇게 68년이 흘렀습니다. 수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알렉산더는 여전히 아이런 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1955년 미국에서 백신이 개발되며 소아마비가 대부분 근절됐지만 알렉산드는 아이언 렁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알렉산더는 이미 많은 것을 이뤘고 지금도 이루고 있다는데요. 통 속에 살면서 공부해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습니다. 이후 미국 텍사스 대에 진학해 법률학을 전공하고 변호사 시험까지 합격하며 법정 변호사가 됐습니다. 역경을 딛고 당당하게 성공한 알렉산더의 사연에 수많은 사람들이 감동했습니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저를 찾아오곤 했습니다. 커다란 기계 속에 들어가 목만 내밀고 있는 저를 보려고 말이죠. 그래서 졸업할 때쯤 친구가 수천 명이나 됐습니다.” 그렇게 수십 년간 통 속에서 지내던 알렉산더에게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점차 몸이 쇠약해 고통에 의존하는 시간이 더 길어지게 된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변호사 일도 그만두고 생존을 위해 싸워야 했습니다. 게다가 2015년에는 아이언 렁의 부품이 낡아서 고장이 나버렸습니다. 아이언 렁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는 그에게는 청천병력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보험사 의료진도 모두 가능성이 없다며 포기했습니다. 아이언 렁은 이미 1960년대에 생산이 중단됐고 남아 있는 기계들도 모두 낡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알렉산더 자신은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방법을 찾았습니다. 알렉산더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사연을 온라인에 공개했고 기계를 고쳐줄 수 있는 기술자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이 기계를 잘 아시는 분을 찾습니다. 반드시 고쳐야 합니다. 한 사람의 목숨이 달려 있어요.” 얼마 뒤 기적적으로 연락이 왔습니다. 아이언 렁을 수리할 수 있다는 연구원이 등장한 것입니다. 그 덕분에 가까스로 기계를 고쳐 다시 편안하게 숨 쉴 수 있게 된 알렉산더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죠. 최근 알렉산더는 입에 펜을 물고 한 글자씩 키보드를 두드리며 자신의 인생을 써내려간 자서전을 완성했습니다. 다 실패한 인생이라며 좌절하고 꿈과 목표를 포기하거나 삶을 비관하는 사람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책을 썼다고 고백했죠. 변호사이자 작가이며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소아마비 생존자인 알렉산더는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저는 제 인생이 부족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오히려 완벽하다고 생각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면 원하는 것을 모두 이룰 수 있다는 것 통 속에서 68년째 살아가는 제가 여러분께 하고 싶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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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이의 아버지였던 그가 동굴에 신발만 보인채 거꾸로 박혀있던 이유…미국에는 많은 수의 동굴이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유타주에 위치한 너티퍼티 동굴은 과거 한 사건 때문에 이름이 더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번 이야기는 동굴 탐험 중 통로에 완벽하게 몸이 끼어버린 존 존스라는 한 청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선 그의 유년 시절은 부모님 포함 아홉 명의 대가족이었다. 존의 아버지는 동굴 탐험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고 존 또한 아버지 덕에 동굴 탐험에 관심이 생겼다. 그의 나이 26살이 되던 때, 그는 결혼을 한 상태였고 한 살의 딸이 있었다. 또한 그의 아내는 둘째를 임신 중이었다. 존은 의과 대학을 다니며 의사를 꿈꾸고 있었는데 추수감사절 휴일을 맞아 집에 온 존은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던 중 너티퍼티 동굴 탐험을 계획한다. 너티퍼티 동굴은 미국 유타주의 솔트레이크 시티에서 남쪽으로 9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였는데 1960년대 카버 데일이라는 사람에 의해 처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너티 퍼티 동굴은 특히 좁고 미끄러운 구간이 많았고 열수분출구에 의해 형성된 지형이 대부분이었다. 이는 동굴 내부가 굉장히 좁고 꼬불꼬불한 통로로 연결되어 있는 형태라는 의미이다. 깊이만 약 50m에 달하는 너티퍼티 동굴은 사실 존 존스가 동굴에 방문한 때로부터 약 5년 전인 2004년에 이곳에서 사고가 일어났었고 지속적으로 사고가 일어나 한동안 폐쇄되어 2009년까지 동굴은 일반인의 입장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다 다시 문을 열자 연 관광객이 2만 명이 넘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는데 너티퍼티 동굴에는 몇 가지 탐험 코스가 있었는데 존 존스와 그의 일행은 넓고 탐험하기 좋은 일반적인 코스로 가지 않고 좀 더 도전적인 곳을 찾아 비좁은 통로로 들어간다. 사람들이 종종 도전하는 코스이긴 했지만 따로 가는 길이 표시가 되어 있지 않고 오로지 흔적에 의존해 길을 찾아가야 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는 코스를 갔어야 했는데 그의 도전 정신은 곧 큰 사고로 이어진다. 너티퍼티 동굴 내부 구간의 특징은 비좁은 통로를 가까스로 빠져나오면 마치 막혀 있던 곳에서 튀어나오듯 넓은 공간에 도착하게 되는 코스가 많다. 존 존스도 이를 예상하고 앞에 나타나는 좁은 통로를 피하지 않고 그냥 들어가게 된다. 존 존스와 그의 일행들은 벽에 난 작은 통로를 발견하고는 머리를 먼저 밀어 넣어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통로가 계속 좁아질 뿐 계속해서 큰 공간을 마주할 수 없었다. 알려진 바로는 존 존스와 일행이 처음에 올바른 통로로 들어갔지만 앞으로 진행하던 중 들어가도 공간이 없어 탐험을 절대 하지 않는 스카우트 이터와 에드푸시 구간으로 잘못 들어갔다고 판단됐다. 이곳에서 존 존스는 가파른 내리막을 만나게 되는데 계속해서 깊숙이 들어가던 존 존스는 그제서야 뭔가 잘못됐음을 깨닫는다. 다행히 다른 일행들이 존 존스를 발견하고 그의 구조를 시도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존 존스가 더 깊은 곳으로 흘러들어가면서 이제 통로에서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존 존스의 발 뿐이었다. 구조대가 도착하기까지 존 존스는 그곳에서 3시간 동안 갇혀 있었고 구조대는 존을 구출하기 위해 동굴 벽에 윤활유를 발라서 밀어내는 방법 등 여러 방법을 고안해내고 있었다. 결국 벽을 뚫어내어 존을 끌어올리는 방법을 택했지만 이마저도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렸고 존이 들어간 통로 바로 위에 천장이 낮아 그를 끌어올리기에도 공간이 충분하지 않았다. 결국 이 방법은 실패하였고 굉장히 많은 인원의 구조대가 현장에 있었지만 존이 위치한 공간이 협소해 단 한 사람만이 직접적으로 구조 작업을 할 수 있었다. 구조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 큰 문제는 존의 자세였다. 존은 거꾸로 매달려 있는 듯한 자세로 머리가 바닥을 향하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몸 속에 모든 피가 뇌로 향하고 있었고 이는 곧 심장에 심각한 부담을 주고 있었다. 구조되는 동안 존이 정신을 잃지 않도록 그의 아내와 존이 계속해서 대화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마침내 구조대의 로프 설치 작업이 끝나 도르레를 이용해 존을 좁은 틈에서 빼내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존을 어느 정도 빼낼 수 있었고 구조대 중 한 명과 틈새로 눈이 마주칠 정도였다. 이대로라면 무사히 구조가 될 것이라 예상되었고 존은 다리 통증을 호소하면서도 미소를 짓기도 했다. 하지만 거의 밖으로 나올 수 있다는 판단이 설 때쯤 로프를 잡아당기고 있던 구조대원들이 한 순간에 뒤로 넘어져 버렸다. 그 중 한 명은 넘어질 때의 충격으로 의식을 잃기도 했는데 원인은 동굴 벽에 박아 고정해 둔 도르레 중 하나가 벽에서 떨어져 나가버린 것이다. 바위가 부러지면서 도르래가 풀려버렸고 그와 동시에 로프가 느슨해지면서 존 또한 다시 틈새로 끼어들어가게 됐다. 손을 전혀 쓸 수 없는 상황인 존 존스는 무방비 상태로 얼굴부터 떨어지게 되었고 이후 수차례 구조 시도를 반복하던 중 한 구조자가 존에게 말을 걸었으나 돌아오는 응답이 없어 공식적으로 2009년 11월 25일에 존 존스의 사망을 확인한다. 직접적인 사인은 심정지로 알려졌고 존을 그곳에서 빼내는 것이 위험하다는 판단에 그가 들어갔던 틈새에 시멘트를 부어 틈새를 막아버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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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영상) 오랫동안 같이 살았던 할머니가 죽자, 주인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무덤에서 오열하는 강아지…지난 2013년 미국의 한 공동묘지 무덤에 기댄 채 사람처럼 흐느껴 울고 있는 개 한 마리가 있다. 이 개의 이름은 ‘윌리’ 무덤에는 세상을 떠난 윌리의 주인 글레디스 할머니가 묻혀 있었다. 오랫동안 할머니와 함께 동거동락했던 윌리는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남겨진 가족들과 함께 무덤을 찾았다. 그런데 무덤에 도착하자마자 그곳에 몸을 기댄 채 온몸이 떨릴 정도로 흐느껴 우는 윌리, 마치 사람처럼 깊은 슬픔에 잠긴 모습이었다. 누군가의 온기를 느끼고 싶은 듯 무덤에 기댄 채 차오르는 슬픔을 감당하지 못하는 윌리의 모습을 보니 저절로 눈시울이 붉혀진다. 아마도 윌리는 할머니와의 정이 아주 깊었던 게 아니었을까. 가족들은 무덤에 기대어 울어대는 윌리가 안쓰러웠는지 윌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해줬다. 인터뷰에 따르면 윌리는 현재 전쟁에서 돌아온 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고통받는 재향 군인에게 도움을 제공하는 단체에 소속되어 아픈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고 한다. 주인을 잃은 개가 슬픔에 빠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주인이 2년 전에 묻힌 교회로 계속 돌아온 12세 독일 셰퍼드 치치오(Ciccio)와 역에서 할아버지를 9년동안 기다리다 죽은 하치코가 있다. 개 하치코는 2009년 리처드 기어가 주연을 맡은 영화가 만들어지면서 유명해졌다. 영화는 매일 아침 출근 전 주인을 따라 역까지 가는 개 하치코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주인이였던 할아버지가 죽고, 하치코는 기차역에서 할아버지가 오기를 9년동안 기다리다가 죽는다. 하치코를 기리기 위해 기차역 앞에 동상이 만들어졌고, 현재까지도 하치코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을 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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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 주의) 속도위반으로 법원에 온 96세 노인의 사연에 방청객과 판사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96세의 나이에 지팡이를 짚고, 한 피고인이 학교 구역에서 제한 속도를 초과한 혐의로 법원에 출두했다. 그는 이 혐의에 대해 “저는 그렇게 빠르게 운전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96세이고 천천히 운전하고 필요할 때만 운전합니다.”라고 말하며 혐의를 부인한다. 판사는 96세의 나이에 왜 그가 운전을 해야하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고 그에게 그 이유에 대해 물었다. 그의 이름은 빅터 콜라로 올해 96세가 됐다. 그의 규칙적인 일과 중 하나는 암투병을 하고있는 64세의 아들 리차드를 데리고 2주에 한번씩 병원에 가서 암 정기검진을 받는 것이다. 리차드는 암으로 인해 몸이 많이 망가졌고 지팡이 2개 없다면 걸을 수 없는 실정이다. 그런 이유로 아들인 리차드의 걸음은 느렸고, 병원에 가야될 시간을 조금 초과했는데도 리차드는 집에서 나오지 않았다. 빅터는 그런 아들에게 화내는 기색하나 없이 서둘러 아들 리차드를 태우고 병원으로 출발하였다. 집에서 출발한지 10분정도 됐을 때 스쿨존 앞의 과속 단속 카메라가 작동하였다. 그는 제한 속도인 40km를 초과하여 시속 45~48km의 속도로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과태료 고지서를 받았고 법정에 출두하게 된다. 법정 재판 당일 빅터는 판사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기를 45분 동안 기다렸고 그의 차례가 됐을때 자신의 주장을 변호한다. 그는 이 재판이 TV 프로그램에 사용되는지도 몰랐고, 마이크를 들고 몸을 구부리고 앉아 입술이 떨며 자신을 변호하고 있었다. 판사와 재판을 방청하는 사람들은 빅터의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글썽일 수 밖에 없었다. 이윽고 판사는 “나는 당신의 아들에게 최선을 다해 암을 이겨내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의 건강을 기원하며, 당신의 사건은 기각됩니다” 라고 말하며 사건을 기각했다. 집으로 돌아온 빅터는 깜짝 놀라고 만다. 전화가 끊이지 않고 울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빅터의 가족과 친구들은 텔레비전이나 온라인에서 그를 보았고 그를 응원하기 위해 전화한 것이였다. 그들의 응원에 빅터는 다시 한번 힘을 냈고, 현재까지도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병든 아들을 잘 보살피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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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관을 기다리지 마세요..” 순식간에 불길이 거세져 250명의 소방관이 눈을 뜨고 바라보고만 있어야됐다는 72명의 마지막순간…대부분의 사람들이 잠들었을 밤시간 24층 높이의 건물에는 수백 명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건물은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고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대로 갇혀버린다. 영국에서는 1930년대부터 슬럼가 정리 사업의 일환으로 저소득 정착지를 고급주택 또는 비즈니스 타워로 개발하였다. 하지만 당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사업이 지연되었고 이후 1960년대 들어 사업이 재개된 후 여러 공공주택이 건설된다. 런던의 서쪽 지역에 위치한 노스켄싱턴, 영화 노팅힐의 촬영지로도 유명한 이 지역은 유독 서민층과 실직자가 많은 지역으로 알려져 있어 국가에서 지원해주는 공공임대주택 개념의 주택 단지가 많다. 그 중 하나였던 랭케스터 웨스트 에스테이트는 1960년대에 설계되어 1974년에 완공된 공공임대주택 단지로 그렌펠 타워라는 24층 높이의 주거용 타워와 900개 동으로 구성된 주택 단지이다. 2017년 6월 13일 밤 23시 45분경 일과를 마친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와 각자의 시간을 보내며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그렌펠타워 4층에 거주하고 있던 베하일루 케베데는 우버 기사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다. 00시 50분경 케베데는 자신의 매트리스에 누워 잠에 들기 전 핸드폰을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화재 경보기 소리가 울려 퍼졌고 이에 케베데는 소리를 따라 부엌으로 향한다. 그가 부엌 문을 열자 냉장고 뒤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는데 이 모습을 본 케베데는 즉시 구조대에 전화를 걸어 신고하였고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온다. 그는 같은 층에 살고 있던 에티오피아인, 소말리아인, 수단인 등 이웃 집 현관문을 두드리며 화재 사실을 알렸고 혹시 모를 2차 사고를 대비해 복도에 있던 전기 차단 장치를 내린 후 건물 밖으로 나온다. 이때까지만 해도 화재는 케베데의 집 안 부엌에서만 퍼지고 있었고 건물의 다른 구역으로는 번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새벽 1시경 신고를 받고 두 대의 소방차를 끌고 도착한 소방관들은 별일 아니라는 듯 자신의 찬 모습으로 케베데에게 자초지종을 물은 후 현장으로 올라간다. 1시 9분경 부엌 창문을 빠져나온 커다란 불길이 건물을 타고 점점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재 사실을 인지한 고층의 주민들은 창 밖으로 몸을 빼낸 채 도와달라며 손을 흔든다. 순식간에 불길이 위로 옮겨 붙어 확산되자 심각성을 느낀 소방관들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을 100미터 이상 멀리 떨어지도록 하였고 물을 발사할 수 있는 소방차와 추가 장비를 본부에 요청한다. 1시 15분경 이제서야 화재의 시발점인 부엌으로 진입한 소방관들은 그곳의 불길을 진압하기 시작하였지만 이미 불길은 건물 외부를 타고 위로 올라가고 있었고 동시에 불에 타버린 파편들이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는데 같은 시각 건물 안에는 약 290명의 거주자 중 34명만이 탈출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1시 30분경이 되었을 때 불길은 건물을 감싸듯 측면으로 타고 올라가 옥상에 도착하였는데 다행히 라마단 기간이라 깨어 있던 무슬림들과 화재 경보기 덕에 110명이 건물 밖으로 대피하였다. 하지만 아직도 건물 안에는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남아 있었고 주변 지역으로 수십 대의 소방차와 경찰 그리고 구급차들이 몰려들었다. 1시 42분경 외벽에 창과 창 사이의 패널을 따라 이동하던 불길은 이제 타워의 북쪽으로 번지기 시작하였고 이후 동쪽 방향으로 방향을 틀어 사방으로 번져갔다. 새벽 2시가 다 되었을 때 추가적으로 20명이 더 탈출하였지만 이 시점에서 건물 내부에 갇혀 있던 사람들 중 절반 이상이 질식사한 것으로 추정되었고 얼마 가지 않아 타워의 동쪽 전체가 불길에 완전히 먹혀버렸다. 구조는 계속되어 오전 4시경이 되었을 때, 48명의 인원들이 추가적으로 구조되었는데 화재가 발생한 4층 위의 구역은 내부의 검은 연기가 굉장히 짙은 상태로 시야 확보가 불가능에 가까웠고 거기다 화재로 인한 열기로 굉장히 뜨거운 상태여서 여전히 접근이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었다. 사실 그렌펠타워는 불이 잘 번지지 않도록 설계가 되어 있어 화재 발생 당시 주민들에게 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을 권고하였는데 화재 진압 실패로 인해 이 매뉴얼이 폐기되었고 이로 인해 뒤늦게 소방관을 기다리지 말고 스스로 탈출하라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더욱 혼란스러운 상황을 겪는다. 오전 8시경 결국 24층의 건물 중 12층까지만 소방관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그 위에 고층은 당장 진입 자체가 불가하였다. 그리고 계속해서 불타오르던 불길은 화재 발생 24시간을 꼬박 넘긴 6월 15일 새벽 1시경이 되어서야 대부분 진압되었다. 사건 이후 조사관들은 냉장고의 결함을 화재의 원인으로 보면서도 불길이 이상할 정도로 빠르게 번진 것에 주목하였는데 이는 2016년에 진행했었던 그렌펠타워의 보수 공사에서 ACM이라는 고인화성 알루미늄의 외장재가 건물에 설치되었는데 이 외장재는 고온에서 잘 녹고 잘흐르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 이로 인해 불길이 더 크고 빠르게 이동한 것으로 보았다. 거기다 창문에도 가연성 재료가 사용된 것이 확인되는 등 건물 자체가 화재 예방에 굉장히 적합하지 않은 상태였다. 결국 이 사고로 인해 총 72명의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고 이 중에는 6개월 된 아기와 각각 2살, 3살, 5살 등 다수의 아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장기간 그렌펠 타워에 거주했던 케베데는 이제 타워의 주거 공간을 실소유로 구매할 수 있게 되어 준비 중이었으나 사고로 인해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케베데는 초기에 건물을 빠져나올 때, 실수로 현관 키를 두고 나와 다시 건물로 들어가지 못하는 바람에 다른 사람들에게 화재 사실을 빨리 알리지 못했다며 정신적으로 굉장히 힘들어하다 결국 정신과 치료를 받게 되었다. 한편 희생자와 생존자의 가족들은 그렌펠타워의 보수 공사를 맡은 자재 회사를 상대로 2019년에 민사소송을 제기하였고, 화재가 발생한 그렌펠타워는 현재 덮개로 가려진 상태로 철거일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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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을 잃을까 두려웠습니다..” 아들을 구하기 위해서 맨발로 악어의 입으로 뛰어든 아버지12살의 디에고 아불하산은 발라바크 마을에 있는 집 근처의 강에서 동생과 함께 수영을 하던 중 악어에게 습격당해 물속으로 끌려갔다. 그들의 아버지 텐자다는 아들의 비명 소리를 듣고 집에서 강까지 91m를 질주하여 나무 판자로 무장한 채 잠수했다. 텐자다는 나무 판자로 악어를 때리고 반복적으로 주둥이를 가격하기 시작했지만, 그럴수록 악어는 아들 디에고를 놓아줄 생각이 없이 아들을 입에 문채 강가로 들어가려고 했다. 텐자다는 아들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필사적으로 악어의 다리를 여러 번 깨물었고 나무판자에도 꿈쩍하지 않던 악어는 당황했는지 그 순간 입을 벌렸다. 디에고는 악어의 입에서 빠져나왔고, 텐자다는 그순간을 놓치지 않고 아들을 데리고 강가 밖으로 뛰기 시작했다. 악어는 이내 물속으로 돌아갔고 텐자다는 부상당한 아들을 빠르게 병원으로 데려갈 수 있었다. 텐자다는 경찰과의 인터뷰에서 “아들이 물려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주저하지 않고 강에 뛰어들어 악어와 씨름했다”고 말했다. 그는 “내 몸에 아드레날린이 너무 많아서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악어를 때렸지만, 악어는 내 아들을 풀어주지 않았다.” “아들이 아파하는 것을 보자 뭐라도 해야겠다는 심정으로 악어의 다리를 최대한 세게 깨물었다.” 라고 당시의 상황을 전했다. 디에고는 부상을 당해 병원에서 퇴원하기 전까지 이틀 밤을 보냈다. 그는 여러 개의 흉터가 있지만 심각한 부상은 없었다. 지역 경찰 대변인은 “다행히도 아버지의 용기 덕분에 피해자는 익사하지 않고 악어에 물린 상처만 입었다”고 말했다. 수사 결과 피해자와 남동생이 강에서 몸을 닦던 중 악어가 갑자기 그의 왼팔을 꺾고 깊숙한 곳으로 끌고 들어가 몸 곳곳에 상처를 낸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동생이 아버지에게 달려가 디에고(형)가 악어에게 물려서 끌려가고 있다고 알렸고 아버지는 그대로 강으로 달려간 것이다. “아들을 위해서라면 위험한 것인지는 상관하지 않고 달려가는 모습에 아버지의 부성애를 잘 느낄 수 있는 사건”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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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식물인간인 줄 알았던 가족, 그러나 12년 후 깨어나, 처음으로 꺼낸 말에 가족들은 충격을 받았다..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사는 마틴 피스토리우스는 12살 때까지 아무런 문제 없이 평범하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뇌가 바이러스에 감염된 후부터 그의 삶은 송두리째 달라졌습니다. 스스로 몸을 움직일 수도 없을 뿐더러 타인과 눈을 마주칠 수도 없게 되었고 나중에는 말하는 능력도 잃게 되었죠.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그는 식물인간이 되었고 의사는 3개월 된 아기의 지능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가족의 도움으로 집에 돌아온 마틴 하지만 그는 더이상 예전의 마틴이 아니었습니다. 혼자서는 스스로 움직일 수도 사고할 수도 없는 존재가 되었죠.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마틴이 서서히 의식을 되찾기 시작한 겁니다. 그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모두 알아들을 수 있었고 스스로 생각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딱 하나의 문제는 의식을 되찾았어도 마틴은 여전히 움직일 수가 없었고 시선은 허공을 향해 있었으며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마치 정신이 몸속에 갇힌 것 같은 상황이었죠. 그 누구도 마틴의 의식이 돌아왔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마틴을 돌보던 사람들은 그를 육체적, 정신적, 성적으로 학대했고 부모님은 나아지지 않는 상황에 자주 다퉜죠. 오랜 시간 병간호로 지친 어머니는 어느 날 누워있는 마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니가 죽었으면 좋겠어” 마틴은 어머니의 말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마틴도 점점 희망을 잃어갔죠. 그는 자신을 자유롭게 할 죽음을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그렇게 10여 년이 흘렀습니다. 마틴의 정신은 여전히 몸속에 갇혀 있었으며 아무런 기대도 없던 주변 사람들은 그를 없는 사람 취급했죠. 그러던 어느 날 새로운 향기요법 치료사가 마틴을 보며 무엇인가를 느꼈습니다. 그녀는 12년 동안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 사실, 바로 마틴에게 의식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마치 정신이 몸속에 갇힌 것 같은 상황이었죠. 그 누구도 마틴의 의식이 돌아왔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마틴을 돌보던 사람들은 그를 육체적, 정신적, 성적으로 학대했고 부모님은 나아지지 않는 상황에 자주 다퉜죠. 오랜 시간 병간호로 지친 어머니는 어느 날 누워있는 마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니가 죽었으면 좋겠어” 마틴은 어머니의 말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마틴도 점점 희망을 잃어갔죠. 그는 자신을 자유롭게 할 죽음을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그렇게 10여 년이 흘렀습니다. 마틴의 정신은 여전히 몸속에 갇혀 있었으며 아무런 기대도 없던 주변 사람들은 그를 없는 사람 취급했죠. 그러던 어느 날 새로운 향기요법 치료사가 마틴을 보며 무엇인가를 느꼈습니다. 그녀는 12년 동안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 사실, 바로 마틴에게 의식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어머니도 자신이 아무리 힘들어도 너에게는 그런 소리를 했으면 안됐는데 자신이 그때는 너무 힘들어서 정신이 나간 것 같다며 마틴에게 고개를 떨구며 사과를 합니다. 그렇게 둘은 서로의 마음을 다시 알아가게 되죠. 마틴은 현재 비록 소리를 내어 스스로 말은 못하지만 컴퓨터의 도움으로 사람들과 소통을 하며 한 인격체로서 성인으로서 당당하게 살고 있습니다. 웹디자이너라는 직업도 갖게 되었고 사랑하는 사람도 만나서 이제는 밝은 웃음을 지니며 지내고 있죠 마틴은 우리 모두가 친절한 마음, 존엄성, 동정심 그리고 존경심을 가지고 상대방을 대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상대가 의식적으로 사고할 수 있든 없든 말이죠. 그는 이것이야말로 세상을 행복하고 따뜻하게 만들며 개개인을 내적으로 더욱 성숙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합니다. 12년 동안 의식이 몸 속에 갇혀 있던 마틴 그리고 다시 희망을 찾은 그의 삶 마틴의 경험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동과 깨달음을 주고 있습니다.